❙ 그림이 있는 성서 에세이32-떡두꺼비

칼럼

HOME오피니언칼럼 


❙ 그림이 있는 성서 에세이32-떡두꺼비
글/그림 황학만 목사

페이지 정보

교회신보 기자 작성일23-10-19 15:49

본문

2e684b88129d1f7264f7977254217c38_1697698118_5247.png
 


우리는 어린 시절 모래밭에서 두꺼비놀이를 하며 자랐다. 주먹 쥔 손에 축축한 모래를 덮고는 그 위를 불룩한 무덤모양이 되도록 두드리는 놀이다. “두껍아, 두껍아! 새집 줄게…….” 동무들은 주먹이 잘 빠져나오길 입을 모아 불러대어도 기대는 없었다. 그저 마음 졸이는 놀이였다. 주먹을 조금씩 펴가며 조심스럽게 빼내지만, 모래집은 이내 허물어지고 다음차례를 기다리던 동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놀던 꼬마들은 모두가 떡두꺼비로 불렸던 아들이었다. 그들이 자라서 성취한 성공과 번영도 노경에 이르러 깨닫게 되는 것은 한낱 어린 시절에 두드리며 놀다 허물어진 모래흙이었다. 어느새 보드랍던 얼굴에는 주름살이 패이고 손등은 검버섯으로 얼룩진 두꺼비 몰골이니 말이다. 그때는 있지도 않은 새집을 주겠다며 헌집 내놓으라고 두꺼비를 불러내었던 건데, 그새 자신의 처지가 가련하게도 그 두꺼비라니······.

모래집을 나오면 대체 누가 새집을 준다는 건가. 그 공언이 슬픈 자기운명의 독백인 줄 몰랐던가. 나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모래더미인데, 새집 주겠다고 불러내던 그 정체가 알고 보니 사망이었던 거다. 그리고 보면 두꺼비놀이가 인간의 숙명을 자조하는 본능적 유희였다. 오갈 데 없는 영혼을 달래며 불러내는 사망의 그 노래, 어머니 태중에서였지. 부풀대로 부푼 모태를 빠져나오면서 악을 쓰며 울었던 그 울음, 자라면서 모래밭에 모여 자신들의 탄생을 자조하는 거였다.  

그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떡두꺼비 집이 어머니의 배속이었지. “조금 더 힘쓰세요. 조금만 더요!” 때가 찼다고 불러내고 악을 쓰고 밀어내니 어쩔 수 없이 나왔던 건데, 떡두꺼비라니······. 그래, 맞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보니 거칠고 질긴 두꺼비 몰골이다. 그런데 그 몸도 모래집이었던가, 사망이 그마저 벗고 나오라고 불러내는 거다. 오갈 곳 없는 그 영혼을.

유족이 몸부림치며 서럽게 우는 까닭은 때가 되면 자신도 오갈 데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울 수 없는 망자라서 후손들이 대신 울겠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망자의 설움이 언젠가는 자신의 설움이라 미리 울어두는 거다. 그런데 사망의 절대권세를 무너뜨린 사건이 벌어졌다. 그 권세를 타파하기 위해 창조주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백성의 사망을 대신 당하신 거다. 

바울의 일갈은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그 비밀이 사망권세의 무위라는 사실과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사망으로 가는 존재가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늙지도 썩지도 않는 몸을 입는다는 거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주검 앞에서는 환송의 찬송을 부를 뿐, 몸을 뒹굴며 애끓는 곡소리로 울부짖지 않는다. 요단강 건너고 하늘아버지집에 들어서는 그날에 그곳에서 다시 만날 테니 말이다.

두꺼비 같은 인생, 모두가 사망이 부른 게 아니었다. 진정 새집을 주겠으니 나오라고 영생이 우리를 불렀던 거였다. 

Category
Facebook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