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중보사역
이정현 목사,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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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신보 기자 작성일23-10-19 15:52본문
원문의 ‘티’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how to pray)가 아니라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what to pray or what to pray for)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흠정역(KJV)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우리에게 알지 못한다’(we do not know what to pray as we ought)고 번역함으로 바른 기도와 관계한 신자들의 근본적인 무능에 주의하게 한다. 이것이 사도가 지적하는 우리의 연약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최선의 것을 알지 못하며, 우리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으로 우리가 잘못된 것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구약의 모세는 훌륭한 중보기도자이다. 그러나 그도 기도해야 할 그 무엇에 관해서는 무능력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니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3-26). 이것은 강하고 엄중한 하나님의 책망이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침묵하게 하셨고, 더 이상 그러한 간구를 가져오지 못하게 하셨다. 모세는 이 시점에서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몰랐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늘 약함 중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기도이기에 하나님께 바르게 드려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중보가 절대 필요한 것이다.
26절의 첫 단어가 ‘이와 같이’인데 이 말 속에서도 성령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이 단어는 앞 문맥의 어떤 사실과 관계됨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인다. 장차 나타날 영광의 소망과 기대가 백성들의 현재의 고난과 탄식 가운데 서로 보존해 주듯(:18-25),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망이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보호, 유지하듯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우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를 도우러 오시는 것은 우리가 빌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연약함이다.
2) 성령의 중보사역의 본질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잘 아시며 그렇게 연약한 자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 로마서 8:26c와 27에 나타난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간구하시느니라”는 많은 질문을 갖게 한다. “성령께서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아버지께 부르짖는 것인가? 또는 우리가 품어야 할 갈망을 우리 마음에 고무시킴으로 간접적으로 도고하신다는 것인가?”(Calvin 1948:313). 이 탄식은 들을 수 있는가 없는가? 성령께서 어떻게 중보 하시는가? 탄식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 같은 질문에 간단히 그 해답을 찾아보고 그분의 중보사역의 본질을 알아본다.
‘그의 중보사역이 직접적인가 간접적인가’라는 질문에 탄식의 사역을 성령에게 직접 돌리기를 거절하는 자가 있으나 다음의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것은 성령의 직접적인 중보임에 틀림없다. 첫째는 앞에서 본대로 갈라디아서 4:6은 성령이 직접 부르짖는다고 표현되어 있고 둘째는, 로마서에서 바울의 강조적 형태인 ‘성령께서 친히’(The Spirit Himself)를 사용한다. 모호한 의미이나 그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안다”고 27절에 말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