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중보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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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중보사역
이정현 목사,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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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신보 기자 작성일23-11-0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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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9922b9e0142452f16be054d8119f6a_1699494180_5525.JPG▲이정현 목사, 소망교회 


여기서의 성령의 마음이란 신자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감찰된 것이다. 셋째는, 성부 오른편에서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한 34절에 사용된 같은 단어 ‘엔투그카네이’(그가 중보한다)가 27절에서 성령의 중보에 관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해 직접 도고하지 아니하시는가? 그 단어가 27절에서는 간접적으로 34절에서는 직접적으로 사용된 단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Kuyper 1969:636-7).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소유하게 되는데, 전자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고 다른 한 분은 지상에서, 우리 안에서 간구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직접적인 중보를 거절하는 이유는 성경해석상의 이유가 아닌 신학적인 이유가 아닐까? 결국 해석학적으로 언어의 본질적인 국면은 크리스천 속에 계시는 성령은 그들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도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직접적인 중보와 간접적인 중보, 둘 다 요구된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질문은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은 무엇을 말하며 그것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가이다. 스피어(Spear)는 여기서의 탄식은 “분명한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는 욕망이나 갈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 깊은 한숨이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Spear 1979:45-46)한다고 했다. 존 머리(J.Murray)는 “내용, 의미, 취지가 없는 것은 아니로되 인위적인 형식의 말을 초월해 있는 것이며 ... 성령께서 간구를 표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머리 1992:61)라고 했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며, 단순히 ‘우리의 원하는 것을 나타낼 수 없다’는 뜻이다. 비록 그 내용이 분명치 않고 우리 마음의 원함을 표현할 수 없으며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성도의 유익을 위한 것으로 효과 있는 탄원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며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성도가 성령의 중보기도를 인식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는 팔머, 바레트, 케제만, 낙스 등이며, 불가능하다는 학자는 카이퍼가 그 대표이다. 

그것을 인간의 귀로 혹은 양심으로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는 인정이 된다는 사실이다. “말할 수 없는”에 관한 크란필드(Cranfield)는 “성령의 탄식은 말로 표현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령의 취지를 표현 없이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Cranfield 1975:423-4)고 지적한다. 그러나 케제만(Kasemann)은 그것을 고전 14:14-15의 ‘프로슈코마이 그로스세’(I pray in a tongue:나는 방언으로 기도한다)와 같은 것으로 연결시켜 놓지만(Kasemann 1980:241ff.) 미첼의 비판을 면지 못한다. “이 탄식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탄식으로 기도하고 있는 분이 성령 자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그것은 신자 자신의 영으로 기도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두 현상 사이의 차이는 명백하다”(Mitchell 1982:237). “이 탄식이 일어나는 곳은 자녀들의 마음이며 ... 성도들의 탄식은 성령의 간구의 매개이며 탄식의 형식으로 은혜의 보좌에 상달되는 것이다”(머리 1992:61).

이런 사실들은 다음 결론을 정당한 것으로 만든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은 ‘신자의 의지나 이해와는 별도로 성령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축복들을 위해 직접적으로 말로는 분명히 표현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탄식으로 천상의 그리스도처럼 중보기도 하신다’는 의미이다.

3) 성령의 중보의 효과

성령의 탄식이 들을 수 없는 것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분명히 알려진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에 의해서는 이해된다. 아버지는 ‘그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표현된다. 만약 그가 인간의 비밀스러운 마음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의 중보적 탄식들과 대화하기에 완전히 가능한 분이시다. 성부는 성령의 마음이 무엇인지 완전히 아신다. 그리고 그분은 다음에 열거한, 즉 “그는 하나님을 따라 중보하신다”는 성령의 마음을 충분히 아신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원문 ‘호티’를 ‘왜냐하면’의 원인절로 번역하며(KJV, NIV, RSV, LB, NASB), 케제만은 이것을 “받아들여진 견해”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호티’를 취하는 것은 신의 뜻에 따른 성령의 중보를 만드는 것이고, 그 이유로는 아버지 하나님이 성령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꼭 필요한 상황은 아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성령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Mitchell 1982:238). 크린필드도 같은 의견으로 “호티는 ‘왜냐하면’ 또는 ‘위하여’보다는 ‘그것’(that)의 의미가 더 낫다”(참고로 왜냐하면 그 구절은 왜 하나님이 성령의 마음을 아시는가를 설명하지 않고 그가 알고 있는 그 무엇에 관해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한다. ‘호티’가 전체구절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주기 때문에 그것의 위치가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첼은 ‘그것’(that)과 관련된 3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첫째, 하나님은 성령의 탄식이 중보의 본질임을 아신다. 둘째, 아버지는 그 중보가 자기 백성들에게 유익한 것임을 아신다. 셋째, 성령의 마음을 아심으로 성부는 성령의 중보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충분히 나타낸다”(Mitchell 1982:238). 여기서 “하나님을 따라”는 원문상 강조 부분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라는 의미로 보통 사용된다(Mitchell Ibil.). 이 성령의 중보적 탄식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으로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분명히 중보에 있어서 성령은 기독교인들의 부족한 기도를 돕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는 모든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요일 5:14-15). 이 구절의 사상을 헨드릭센은 잘 포착하였다. “... 탄식이 동반된 설령의 간구하심은 성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함으로 그 결과 이 탄식으로 간구하심은 항상 효력이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 모든 간구들은 마침내 하늘에 상달된다”(헨드릭센 1984:380-1).

로마서 8장은 성도의 기도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준다. 그 중 하나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측면에서의 성령의 역할을 로마서 8:15이 증명하며, 우리 안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중보하시는 사역에 관해서는 로마서 8:26, 27이 증명한다. 전자의 성령은 바울서신, 갈라디아서 4:6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종의 영’으로가 아닌 ‘양자의 영’으로 오신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도우신다.

로마서 8장에 제공하는 또 다른 유익한 한 정보는 우리에게 두 중보자를 제시한다는 점이다. 신자는 두 신적인 중보자를 가진다. 그리스도는 하늘 법정에서 그들이 중보자이시다. 성령은 그들 자신의 마음의 현장에서 중보하신다(참고, 롬 8:34, 히 7:25, 요일 2:1, 요 14:16,17, 롬 8:26-7).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지적하며, 이 둘의 사역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며 “양 중보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한 하나님의 행동이다”(Obeng 1984:363).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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